[창간특집] 조용필 노래인생 50년, 숨은 스토리 베스트5

오광수(출판국 부국장, 조용필 5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 2018. 5. 16.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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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인 1968년 3월, 18세 소년이 가출했다. 비틀즈와 롤링스톤즈, 벤처스를 좋아하던 소년은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완고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룹 ‘에트킨즈’를 결성하여 경기도 파주 미8군 나이트클럽 <DMZ> 무대에 섰다. 몇 개 안되는 레퍼토리로 버티면서도 기타를 메고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찼다. 그 소년을 오늘 ‘조용필’이라고 쓰고 ‘가왕’이라 부른다. 분단된 나라, 생존이 절박했던 대한민국을 살아온 우리에게 조용필은 무엇이었나? 노래 인생 50년 뒤에 숨은 스토리를 통해 조용필의 음악세계를 짚어봤다.

지난 1월 중순 그의 사무실 근처에서 만난 퇴근길의 조용필. 그의 백팩에는 늘 신곡작업을 하는 악보들이 가득 담겨있다. 사진제공 조용필

■ 1971년 8월 중순,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 김트리오 조용필은 요즘 술을 마시지 않는다. 지난 겨울 저녁 자리에서 모처럼 반주 한 잔을 하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것도 반주로 마신다”고 했다. ‘천하의 주당’으로 불리던 조용필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내 인생은 음악과 술이 전부”라고 말하던 조용필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술을 먹기 시작한 것은 미8군 무명가수 시절이었다. 1971년 여름 ‘김트리오’ 멤버로 활동하던 시절에 리더인 김대환(드러머), 이남이(기타) 등과 부산 해운대 백사장에서 소주를 마셨다. 김대환은 매니저로 물러나고 새로운 드러머를 영입하여 새출발을 다짐하던 자리였다. 그날 조용필과 멤버들은 줄잡아 각 12병의 소주를 마셨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음악과 인생 이야기에 날 새는 줄 모르고 마신 것이다.

연예기자 이상벽, 개그맨 허참, 작고한 코미디언 이주일 등은 조용필과 술잔을 기울이던 선배들이었다. 특히 같은 회사 소속이었던 이주일과는 술자리를 둘러싼 에피소드가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또 80년대 들어서는 홍상수 감독의 어머니이자 문화계 대모였던 전옥숙, 시인 김지하 등과 어울려서 술을 많이 마셨다. 김지하는 감옥생활을 하면서 쥐구멍을 통해 들려오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듣고 조용필을 좋아하게 됐다고 고백한 바 있다.

■1975년 12월 중순. 부산 코모도호텔 나이트클럽, 돌아와요 부산항에 1975년 겨울, 미8군으로 시작하여 여전히 밤무대를 떠돌던 조용필은 여전히 무명이었다. 그당시 유행하던 극장식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면서 소위 ‘땜방 가수’로 일하고 있었다. 아무도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자를 모르니 인기가수가 지각을 하거나 무대를 펑크 내면 대신 올라가서 시간을 메우는 일이었다. 갑자기 연예부장이 조용필을 찾았다. 간판가수 조미미가 오지 않았으니 ‘바다가 육지라면’을 부르라는 거였다. 조용필이 “내 노래를 부르겠다”고 고집했다. “뭐 이런 놈이 있어”라면서 주먹이 날아들었다. 당시로서는 연예부장이 무명가수에게는 수퍼갑이었다. 조용필은 또 한쪽의 뺨을 내민 끝에 무대에 올라가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다. 음악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포기하던 조용필이었기에 그의 오늘이 있었다.

■1980년 3월 20일, 서울, 창밖의 여자 사실상 1집 앨범인 <창밖의 여자>가 나오던 날을 두고 훗날 조용필은 “나의 노래 인생 2막을 알리는 서곡이자, 인간 조용필의 실패를 알리는 서곡”이라고 말했다. 100만장 이상 판매된 이 앨범으로 조용필은 지구레코드로부터 1000만원과 승용차 1대를 받았다. 전속계약 때문에 레코드사에서 주는 대로 받던 시절이었다. 1986년 전속계약이 만료되면서 인세제로 전환됐지만 앨범의 저작권은 여전히 지구레코드가 갖고 있었다. 2013년 신대철 등 후배가수와 네티즌들의 청원운동 끝에 ‘창밖의 여자’등 31곡의 저작권을 찾아올 수 있었다.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가수가 된 조용필은 인기를 얻었지만 자유롭게 음악을 하던 밴드의 시대를 마감해야 했다. 그는 늘 스포츠신문, 주간지 등 연예기자의 표적이었다. 조용필 스캔들 기사 한 건을 써야 연예기자로 인정받던 시절이었다. 조용필은 “촌놈이 갑자기 인기스타가 되자 주변에 여자들이 들끓었고 나는 자만에 빠졌다”고 80년대를 회상했다. 박지숙과의 결혼과 이혼은 본인의 의지보다는 매스컴의 등에 떠밀린 결과였다. 조용필은 인기를 감당하지 못한 자만심 때문에 한 여자에게 상처를 줬다고 고백한 바 있다.

■1988년 8월 6일, 베이징, 친구여 ‘K팝’과 ‘한류’가 흔한 단어가 됐지만 우리 대중음악의 해외개척 역사의 선봉에는 늘 조용필이 있었다. 일본 활동은 기왕에 잘 알려져 있지만 중국 진출을 위한 조용필의 노력은 폄훼된 면이 없지 않다.

조용필은 1988년 8월 6일 ‘죽의 장막’이라 부르던 중국 베이징의 장성호텔에서 단독콘서트를 가졌다. 한중수교보다 4년 앞선 시기였는데 놀랍게도 ‘친구여’가 ‘만추’라는 노래로 번안되어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조용필은 1981년 일본에서 펼쳐진 아시아콘서트 때 만리장성 사진을 보고 중국공연을 기획했다. 1984년 7월 일본 도쿄 콘서트 직후 중국 진출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에서 콘서트를 갖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4년 뒤에야 덩샤오핑의 딸이 회장으로 있던 동방미술교류학회의 힘을 빌어 공연허가를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베이징 공항에 내린 조용필은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묘한 설렘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원래 베이징호텔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으나 갑자기 공연이 불허되어 장성호텔에서 공연을 가졌다. 1300여명의 관객 앞에서 ‘한오백년’과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을 부르자 폭발적인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친구여’를 불렀을 때 관객들이 모두 따라해서 감격이 눈물을 흘렸다.

■1994년 8월 18일, 강남 한 호텔, 서울신화 ‘가왕’ 조용필에게 ‘남은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내 노래로 뮤지컬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1994년 8월 18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조용필이 긴급 기자회견을 했다. 그가 직접 기획한 뮤지컬 <서울신화> 공연을 무기한 연기한다는 내용이었다. 9월 공연 예정이던 이 작품은 소설가 유현종이 대본을 쓰고, 고석만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그가 직접 작편곡하고, 위대한 탄생과 함께 출연하는 무대였다.

조용필은 훗날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욕심만 앞섰지, 국내 상황을 잘 모른 채 무턱대고 덤벼들었다”면서 “대충 하자고 생각하면 졸작에 그칠 게 뻔했다. 문 닫고 매 맞는 게 낫겠다 싶었다”고 당시 상황을 고백했다. 그당시 상심이 얼마나 컸던지 갖고 있던 악보와 자료들을 모조리 불살랐다고 했다.

조용필에게 뮤지컬은 짝사랑의 대상이다. 90년대 이후 틈만 나면 스태프들과 함께 브로드웨이에 가서 뮤지컬을 봤다. <거미여인의 키스>를 9번 관람한 적도 있다. 1996년부터 수년동안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렸던 조용필 콘서트가 뮤지컬식 무대로 각광받았던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언젠가 무대에 오를 조용필표 뮤지컬은 기대할만 하다.

■2003년 8월 30일, 서울 잠실 주경기장, 킬리만자로의 표범 조용필에게도 잊을 수 없는 무대가 있을까? 언젠가 사석에서 그에게 물었을 때 2003년 서울 잠실 주경기장 무대를 꼽았다. 조용필 35주년 기념 콘서트로 열린 ‘더 히스토리-킬리만자로의 표범’에는 4만5000명의 유료관객이 몰려들었다. 무대 세트에만 수십억원, 진행 요원 1000명 이상이 동원된 전무후무한 콘서트였다.

정작 조용필에게 그날 무대의 규모나 관객수가 감격스러운 게 아니었다. 공연이 열리던 날 폭우가 쏟아졌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무섭게 내리던 폭우였다. 야외공연의 특성상 내리는 비를 어쩔 수는 없었다. 그러나 4만여 명의 관객들은 단 한 명도 빠져 나가지 않고 끝까지 조용필의 노래를 열창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마지막 엔딩곡을 부른 뒤 무대 양쪽을 뛰어다니면서 인사를 하던 조용필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그래 나는 성공했어. 가수로서 성공한거야. 이런 팬들이 있는 한 나는 인생의 승리자야.”

조용필은 지금도 그날의 무대를 생각하면 청년처럼 가슴이 울컥하면서 힘이 솟는다고 했다.

<오광수(출판국 부국장, 조용필 5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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