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도 봤다는 책, 여자 아이돌이 봤다고 욕설 세례
[오마이뉴스 글:김준수, 편집:최유진]
황당하게도 걸그룹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게 논란이 됐다.
레드벨벳은 지난 18일, SKT 옥수수와 XtvN에서 방영 중인 예능프로그램 <레벨업 프로젝트2 >가 1000만 조회를 달성한 기념으로 팬미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최근 읽은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이린은 "최근에 <82년생 김지영> 읽었고. <별일 아닌 것들로 별일이 됐던 어느 밤>도 읽었다"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읽었다"는 말 외에는 책의 내용이나 감상을 따로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남성 팬 사이에서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말이 '여성 아이돌 멤버가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라는 식으로 퍼지면서 논란이 됐다.
인터넷 커뮤니티인 '디씨 인사이드' 중 아이린 갤러리와 레드벨벳 갤러리에는 아이린의 발언에 분노하는 게시글이 올라왔고, 심지어 아이린의 사진(포토카드)을 불태우는 '인증샷'이 올라오기도 했다(현재는 삭제됐다).
해당 커뮤니티와 SNS에 올라온 반응 중 많이 공유돼 알려진 것으로는 "나 진짜 평생 팬 하려고 했는데 이건 아니지", "잠시나마 진심으로 니 O이랑 결혼하고 싶어했던 내가 O신 같네" 등의 글도 있었다. 일부 게시글은 노골적인 조롱과 여성혐오의 내용을 담기도 했다.
대통령도 봤다는 <82년생 김지영>
특정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아이린이 비난을 받자 누리꾼들도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올케이팝 사이트에서도 "웃음밖에 안 나온다"라는 트위터 글을 인용해서 올리기도 했는데, 단지 '어떤 책을 읽었다'는 발언만으로 이 정도의 비난이 나오는 게 상식적이냐는 지적이었다.
사진을 불태우는 '인증샷'이나 비하적 게시글을 보면, 마치 아이린이 심각한 혐오 표현이 담긴 책이라도 읽은 듯한 분위기다. 지난해 베스트셀러이기도 한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통계와 기사로 소개된 한국 여성의 현실을 소설로 풀어낸 책이다. 이미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책을 읽었다고 밝혔고, 정치권에서도 언급할 정도로 화제가 된 책이다.
그뿐만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지난해 5월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 5당 원내대표 자리에서 "존경하는 문재인 대통령님께, 82년생 김지영을 안아주십시오"라는 글과 함께 책을 문 대통령에게 선물했고 이후 영부인으로부터 "잘 읽었다"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이런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팬미팅 자리에서 언급했다고 비난을 받고 사진이 불태워져야 할까? 혹은 욕설이 섞인 비난, '탈덕(입덕의 반대말, 좋아하던 것을 그만둔다는 뜻)한다'는 말까지 들어야 할 상황일까?
여성 아이돌의 자기 표현이 왜 그렇게 두려운가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지난 2월 13일 걸그룹 '에이핑크'의 멤버 손나은은 SNS에 자신이 올린 사진 한 장에 대힌 비난 여론이 일자 결국 해당 게시글을 삭제했다. 당시 손나은은 '걸스 캔 두 애니띵(Girls can do anything)'이라고 적힌 스마트폰 케이스를 손에 쥐고 있었다는 이유로 비난 댓글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댓글과 SNS에서는 '소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 페미니즘을 표현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다가, "여성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말 아니냐"는 황당한 논리 비약으로 이어졌다. 결국 손나은은 본인의 SNS 계정에서 사진을 삭제하고 "패션 브랜드 업체에서 협찬받은 것"이라고 해명해야 했다.
아이린은 당시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게스트 4명 중 나이가 가장 어렸지만, 그녀를 소개하는 자막은 "26살이라 보기엔 베이비페이스"였다. 아마 여성 아이돌 멤버라는 정체성 때문이었을 거다. JTBC <아는 형님>에 출연했을 때는 아이린이 "취미가 다림질"이라고 말하자 남성 출연자가 자신의 옷을 집어던지며 "야, 다려 봐!"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겪은 아이린으로서는 <82년생 김지영>이 주는 울림이 남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 경험을 팬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책을 읽었다'고 말한 것은 아닐까.
성폭력과 차별에 맞서는 '미투 운동'은 할리우드에서도 이어지고 있고, 한국 연예계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여성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나이마저 평가의 대상이 되고, 개인기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태도가 논란이 되는 상황. 아이린이 자신의 위치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팬으로서 뿌듯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만약 팬을 자청하면서 아이린의 말조차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온갖 해석'을 덧붙여 공격해야 속이 시원해지겠다면, '탈덕'이 아니라 '도태'가 더 자연스러운 진행일 것이다. 도태마저도 싫다면 두 문장을 기억하도록 하자. "여성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성들은 무엇이든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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