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행위자가 '의인'으로 둔갑..<1987>이 가린 진실
[오마이뉴스 글:김종성, 편집:최유진]
아니나 다를까. 가슴이 뜨거워지는 영화였다. 뜨겁다 못해 끓어 넘치게 만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이었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가.
영화 <1987>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년 1월)'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어처구니 없는 거짓 발표로 잘 알려진 사건 말이다. 이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다루고, 마침내 6 · 10 민주 항쟁까지 이어진다. 영화는 스물 두 살 대학생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광장의 거대한 함성, 그 역사의 흐름을 다뤘다.
▲ 영화 <1987>의 포스터 |
ⓒ CJ엔터테인먼트 |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등 여섯 명의 주연 배우를 비롯해 특별출연을 한 설경구, 강동원, 여진구, 오달수, 김의성, 문성근, 우현, 문소리, 고창석 등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수많은 배우들도 빛났다. 그들은 분량에 관계없이 뜨거운 열정을 보여줬다.
영화가 주는 감동이나 배우들의 열연 혹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가치 등에 대해선 이미 수많은 기사들이 이야기했을 테니, 이 글에선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987>을 보면서 감동에 젖는 한편, 가슴 한켠에 계속해서 웅크리고 있던 불편함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구미유학단 간첩단 사건(1985)의 피해자인 강용주씨가 <1987>을 두고 고문의 가해자인 안유를 미화한 영화라며 보이콧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그 어떤 영화보다 극적이었던 그때 그 시절
▲ 영화 <1987>을 보이콧했던 강용주 씨 |
ⓒ 강용주 |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데 교도관들의 역할이 중요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등포 구치소 보안계장 안유는 조한경(박희순), 강진규가 가족 및 경찰관들과 면회하는 자리에 입회하면서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된다. 경찰이 명백한 물 고문으로 인한 사망을 단순한 심장 쇼크사로 조작하고, 그 대상자도 조한경과 강진규 두 사람으로 축소하려던 정황을 포착한 것이다. 안유는 당시 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재야 민주투사 이부영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린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이부영은 친분이 있던 교도관 한재동(유해진)에게 '비둘기(감옥에서 몰래 보내는 편지)'를 부탁하고, 한재동은 그 편지를 재야에서 활동하던 민주화 운동가 김정남(설경구)에게 전달한다.
김정남은 성명서를 작성해 함세웅 신부에게 보냈고,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추도 미사가 끝난 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게 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그 어떤 영화보다 극적이다.
▲ <1987>의 스틸 사진 |
ⓒ CJ엔터테인먼트 |
그 때문에 영등포 교도소 보안계장 안유(최강일)와 교도관 한재동(유해진)은 '의로운 교도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1987>은 '딥 스로트'(내부 고발자) 안유라는 인물을 철저히 의인으로 그려나간다. 그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이고, 이를 위해서라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대공수사처 박 처장(김윤석)과도 맞선다. 아무래도 그가 세웠던 공을 높이 샀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이부영 전 의원과 같은 '민주인사'들의 진술만을 토대로 캐릭터를 구성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강용주 의사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제게 인간 이하의 가혹행위를 가한 대구교도소의 그 보안과장이 바로 KBS 다큐멘터리(<시민의 탄생>)에 출연한 6월항쟁의 '딥스로트'입니다. 1992년은 87년 6월항쟁으로 독재정권의 야만적 전향공작이 사라졌다고 여겨진 시기였습니다. 광주나 전주로 이감 간 사람들은 징벌방 수용이나 전향 강요를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구교도소 보안과장의 손으로 전향공작을 당했습니다. '참 양심적이었고', '민주인사들에게 잘 대해 준' 바로 그 사람 손에서 말입니다." <경향신문>, [강용주의 안아픈 사회] '딥스로트'의 이중잣대
역사적 사실을 감추는 건 결국 '미화'인 셈
▲ <1987>의 스틸 사진 |
ⓒ CJ엔터테인먼트 |
안유라는 인물과 그가 했던 내부 고발의 중요성은 충분히 이해된다. 또, 그가 '변절자'로 불리며 교정계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처지가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가해자'라는 것도 변함없는 객관적 진실이다.
'안유=가해자'라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감추는 건 결국 '미화'인 셈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영화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여지지도 않는다. 잘 나가는 영화에 웬 트집이냐고? 감동적인 영화에 웬 태클이냐고? 그리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그 누구도,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을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 자신에게 가혹행위를 저질렀던 사람이 버젓이 의인으로 나온다면, 과연 당신은 뭐라 말할 것인가. <1987>을 보며 마냥 감동에 젖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1987>도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세심하지 못함에 더욱 불평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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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종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wanderingpoet.tistory.com)와 <직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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