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핏줄도 실력인가요?

입력 2017. 7. 23. 14:16 수정 2017. 7. 23. 23:2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00도] '스타 가족'에 빠진 TV

'둥지탈출' '싱글와이프' 등 10개 육박
핏줄 마케팅으로 화제성 키워
쉽게 연예계 데뷔..지망생들 박탈감

[한겨레]

<아이돌학교>에 출연한 가수 김흥국의 딸. 화면 갈무리

“우리 부모는 왜 연예인이 아닌가요?”

언제부턴가 연예인 지망생들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푸념이다. 누구는 평생을 바쳐도 얼굴 한 번 내비치기 힘든 티브이에 연예인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손쉽게 출연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상파와 케이블·종합편성채널에 ‘연예인 핏줄’이 나오는 프로그램만도 10개 가까이 된다. 연예인의 아들딸이 여행하는 <둥지탈출>(티브이엔)과 연예인 아내들이 여행하는, 새달 2일 시작하는 <싱글와이프>(에스비에스), 연예인 부모가 소개팅하는 <엄마의 소개팅>(케이비에스드라마), 연예인 부모가 자식의 데이트를 지켜보는 <내 딸의 남자들>(이채널) 등이다. 그중에는 연예인 지망생인 자식들을 노골적으로 홍보해주는 프로그램도 있어 ‘연예인 세습’ 논란도 인다. <아이돌 학교>(티브이엔)에 나오는 김흥국의 딸은 아이돌 지망생이고, <둥지탈출>에 나오는 최민수의 아들은 배우 지망생이다.

핏줄을 이용해 손쉽게 연예계에 데뷔하고 티브이에 출연하는 행위는, 땀 흘리며 노력하는 수많은 이들한테 상대적 박탈감을 안길 수밖에 없다. 재력과 권력, 인맥 등 부모의 유무형 자산이 고스란히 자식에게 전달되는 사회 분위기가 ‘신분상승’의 마지막 통로처럼 여겨지던 연예계에까지 스며들었다는 우려가 흘러나온다. 방송을 취미생활하듯 누리는 것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아이돌 연습생과 무명배우 등 여러 명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가상의 ‘연예인 지망생 나’의 목소리를 통해 연예인 ‘핏줄 마케팅’과 세습 논란의 문제점을 짚었다.

■ “우리 아빠는 왜 김흥국이 아닌가요”

연습생 생활 7년 남짓, 어느덧 20대 중반. 가수가 되겠다고 기획사에 들어올 때만 해도 금방 스타가 될 줄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 있다는 소리를 곳곳에서 들었다. 그러나 매번 데뷔조 선발에서 아쉽게 떨어졌다. 노래는 잘하는데 2% 부족하다고 했다. 답은 하나였다. “노력해서 2%를 채우자.” 이 악물고 연습했다. 목이 쉬어라 노래했고, 잠 안 자고 춤을 췄다. 기획사 어른들은 “재능 있으니 곧 데뷔할 것”이라고 다독였다. 그 말에 희망을 걸었다. 2%를 채우려고 나는 매일 땀을 비오듯 쏟았다.

그런데 늘 밀렸다. “이번엔 데뷔할 거야”라고 격려하던 윗분들이 몇달 뒤 날 외면했다. 나 대신 들어간 사람은 알고 보니 투자자의 딸이었고, 알고 보니 제작자 지인의 아들이었다. 평범한 집안의 나로선 부럽기도 했지만, 또 부럽지 않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노력하면 된다고 믿었고, 노력해서 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내 부족한 2%를 채웠다면 저 아이들의 배경에 밀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그러나 몇해 전부터는 그런 의욕마저 완전히 꺾였다. 연예계에 세습이 판을 치면서 내가 설 자리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연습생들끼리는 “왜 우리 집안에는 연예인이 한명도 없냐”고 푸념했다. “아빠 아는 사람 중에 연예인 없어?”, “엄마 친구 중에 연예인 없어?”가 유행어가 됐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은 연예인 2세들이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는 얘기도 나온다.

<아이돌 학교>에 나온 김흥국의 딸을 보면서는 이런 자괴감이 더 커졌다. <프로듀스 101> 등 연습생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많다 해도 그 또한 출연하기는 우리 같은 애들한테 하늘의 별따기다. 그런데 그게 2세들한테는 참 쉬워 보였다. <아이돌 학교> 피디는 “일반인 출연자들을 뽑았다”고 했지만, 아역배우 이영유도 아이돌이 되겠다며 참가했고, 이미 데뷔했던 걸그룹 멤버도 있었다. 김흥국 딸의 출연도 화젯거리가 될 수 있을 테니 제작진이 가산점을 준 건 아닐까, 삐딱하게만 보인다. <아이돌 학교> 첫 방송을 본 이후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김흥국 딸은 대체 나보다 뭐가 뛰어난 거지, 뭘 잘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는데,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아빠가 김흥국이다.

그들에겐 뭐가 그리 쉬운 걸까

<둥지탈출>에 출연한 배우 최민수의 아들. 화면 갈무리

이게 다 2015년 <아빠를 부탁해>(에스비에스)에서 시작됐다. 무명 배우였던 조혜정이 아버지 조재현과 함께 <아빠를 부탁해>에 출연한 뒤 여기저기 드라마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제2의 조혜정’이 우후죽순 쏟아졌다. 조혜정은 작품마다 연기력 논란이 불거졌지만, 계속 주·조연을 맡았다. 아, 모델 이진이도 있구나. 배우인 엄마 황신혜와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자신을 알렸다. 이진이가 모델인지도 몰랐는데 엄마 ‘껌딱지’처럼 여기저기 붙어 나오니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됐다. ‘아, 저게 연예계 세습의 힘이구나’ 실감했다. 그러고 보니 박남정의 딸과 이경실의 아들은 2013년 시작한 <유자식 상팔자>(제이티비시) 출연 이후 배우가 됐다.

요즘은 최민수의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럽다. 아빠가 주연으로 나오는 드라마 <죽어야 사는 남자>(문화방송)에 아빠의 아역으로 출연하다니. 이보다 더 손쉬운 캐스팅이 어디 있나. 아빠가 주연이어서, 마침 아들이 배우 지망생이어서 피디가 제안했단다. 심지어 엄마 손 잡고 <둥지탈출>에도 나온다. 외국에서 연기를 전공했다지만 한국에선 오디션에 여러 차례 떨어졌다는데, 아빠 이름을 내세우니 드라마에도 나오고 예능에도 나온다. 내 엄마, 아빠가 연예인이었다면, 그래서 나도 엄마, 아빠 손 잡고 티브이에 나갔다면 내 실력이 문제가 됐을까.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연예인 2세들의 손쉬운 티브이 출연은 이미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한테도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 얼마 전 만난 40대 무명 배우 아저씨는 ‘연예인 세습’을 보면서 이 직업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다 늙어서 부모를 원망하게 된다”고 했다. 정작 배우라는 직업으로 먹고사는 그 아저씨한테는 갖기 힘든 기회가 연예인 2세들한테는 왜 그렇게 쉬울까.

억울하다는 소리나 말지…

<무한도전>에 출연한 박명수의 아내. 화면 갈무리

심지어 우리 같은 ‘흙수저’들은 비연예인한테도 밀린다. 피부과 의사인 박명수의 아내는 그 나오기 어렵다는 <무한도전>(문화방송)에 나와 “이제 방송 좀 해보려고 한다”고 한마디 하더니 바로 성사됐다. 박명수가 진행하는 <싱글와이프>에 8월부터 고정출연한다. 박명수는 <싱글와이프> 맛보기(파일럿) 프로그램 방영 전 제작발표회에서 “정규편성되면 아내를 출연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걸기도 했다. ‘아니 자기 아내가 뭐라고.’ 화가 나 씩씩대다 보면 의욕도 사라진다. 피디들은 “얼굴 알려진 연예인 가족이 나오면 호기심에 보는 경우가 많아 시청률이 안정적으로 나온다”는데 이러다 사돈에 팔촌까지 나오겠다는 성토가 절로 나온다.

누가 봐도 연예인 가족이 받는 특혜인 걸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조혜정은 스스로 노력했는데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억울하다더니 아빠가 드라마 촬영장에 응원 온 사실을 보도자료까지 써서 언론에 알린다. 최민수는 아들의 출연이 의도와 다르게 비춰질까봐 걱정하면서 굳이 아들을 출연시킨다. 그냥 더 많은 기회가 생기고 주목받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더 열심히 하겠다”고 하면 안 되나. 억울하다, 힘들다면서 연예인 가족을 등에 업고 출연하는 이중적인 행태가 우리 같은 이들을 더 아프게 한다는 걸 왜 모를까.

손쉽게 꿰찬 그 자리는 누군가가 목숨 걸고 잡고 싶어한 기회였을 수도 있다. <슈퍼스타케이 시즌7>에 174만명이 지원하는 등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은 할 때마다 참가자가 넘친다. 대형 기획사의 연습생이 되려고 매년 수천명이 도전한다. 2015년 2월에는 5년 넘게 연습생 생활을 했지만, 데뷔 직전에 늘 꿈이 좌절된 한 가수 지망생이 스스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그의 부모가 연예인이었으면 어땠을까? “능력 없으면 너희 부모를 원망하라”던 정유라의 말에는 분노하던 사람들이 왜 연예계의 세습에는 관대할까. 아, 생각할수록 화가 밀려온다. 하지만 다 부질없다. 제작진조차 시청률에만 매달린 채 귀를 닫는 걸. 이미 나도 데뷔하긴 틀린 게 아닐까.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 페이스북][카카오톡]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