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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문열 "참 멋진 보수 되고싶어"

2007. 1. 22.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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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인터뷰 전문] "보수꼴통이란 말에 충격…"

'너 전라도지?"발언

2001년'책 장례식'때 한 말이 와전… 내가 그런 바보 같은 말 할 이유없어

극우보수 비판 왜 안하나

전두환때 말 못한거 많이 부끄러워… 그게'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죠

향후 우파정권 예상하는데…

한나라 내부 경쟁 보기 꼴사나워… 1년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

◆인터뷰에 너무 흔쾌히 응해주셔서 의외였습니다.

"이거(100°C 인터뷰) 막 혼내키고 되게 무섭다카데요.(웃음) 그래서 예상문제도 만들고, 모범답안도 만들어 왔는데, 막상 만나니까 한 개도 생각이 안 나네. 사실 하도 고약한 경우를 많이 당해서 겁나요. 대충 세보니까 내가 안 한 말로 오해 받고 있는 게 19가지나 되더라고요."

◆무슨 오해를 그렇게 받으셨다는 겁니까.

"몇 년 전 고약한 경우를 당했어요. 책 장례식 할 당시 11월 부산 해운대 모 호텔에 강연을 갔었어요. 10월 즈음부터 책 장례를 주동한 사람들이 부산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어릴 적에 부산서 5년간 살았거든요. 그래서 강연장에서 "이만 하면 저도 부산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라고 물었더니 다들 "부산 사람이라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아는 바로는 책 반환운동 하면서 책 모으고 있다는 사람들은 부산 사람 아닌 것 같다. 부산사람들은 성격이 급하고 직정적이어서 한 권씩 책 모아서 불태우고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말했어요. 그랬더니 책 장례식의 주동격인 사람이 찾아와서 "선생님, 그럼 내가 부산 사람 아니면 어디 사람입니까? 전라도 사람이란 말입니까?"하더라구요. 그때 내 실수가 "어느 지역이든지 간에"라고 했어야 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한 게 실수예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내가 할아버지 때부터 함안서 살았고 아내도 전라도가 아니다" 하길래 내가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내가 할아버지 때부터 3대가 부산에서 살았다'고 한 말이 '이문열이가 '너 전라도지? 3대를 몰살하겠다'고 말했다카드라'고 퍼진 거예요. 저는 "책은 내 정신적 자식인데 자식이 내 앞에서 장례식(죽음)을 당하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냐"는 뜻으로 말했을 뿐인데요.

이후 2004년 고종석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이걸 칼럼('당신이 바로 하류 지식인이다')으로 쓰면서 내가 공식적인 모임에서 그런 말을 한 것처럼 알려졌고, 이걸 또 최근에 경향신문도 칼럼으로 썼더라구요. 그 때 이후로 내가 갑자기 지역주의자가 되어가지고 호남이라는 큰 시장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할 이유가 없어요. 호남 사람들도 나를 적으로 만들어서 생기는 이점이 하나도 없구요. 어떻게 보면 누군가의 이간질에 휘말릴 거예요. 고종석씨는 한겨레에서 기자 생활을 할 때, 내 작품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고 잘해줬어요. <시인>도 엄청나게 아름다운 평을 해 준 사람입니다. 내가 한겨레와 관계가 좋지 않을 때에도 고종석씨하고는 좋았어요.

2000년부터 이후 6년 동안 이런 자잘한 이야기들을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하나 둘씩 모이니까 엄청난 데미지가 돼 버렸어요. 지역문제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소연하고 싶은 일은 19건이에요. 이것 가지고 책을 써도 되겠다는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지역 문제 관련한 것은 어쩌면 사소한 것이에요.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가 가장 큰 사건이었죠. 미국에서 강연을 했어요. 제목이 '한국 이념의 현주소'였나? 그런데 강연이 끝나고 청중 한 명이 다가와 묻더라고요. "효순이 미선이 장례식 때 10만 명이 모였다는데 다들 용공분자 아니오?"라고. 제가 웃으면서 "당신도 참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된 사람이군요. 용공분자라는 말은 '빨갱이'란 말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한국서 바보 취급당해요"라고 했어요. 저는 용공분자, 빨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명백하게 남한에게 불리하고 북한에 유리한 정보를 상시적으로 북한으로 보내는 사람을 이르는 것이라고 정의했어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체제에 호의적인 건전한 시민이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래도 용공분자가 있을 것 아니오?" 재차 물읍디다. 그래서 북한에 호의적인 것은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있는 것이니까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용공분자가 있다면) 오차범위를 생각해보면 전체에서 2~3%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미국에서 "(촛불집회) 당시 2,000~3,000명의 간첩이 내려왔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떠 있더라고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관련한 항의 칼럼을 중앙일보에 게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친일문제도 그래요. 그것도 2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90년대 초반에 유럽공동체다 나프타다 이런 것들이 생길 때, 베세토(베이징,서울, 도쿄를 잇는 한중일 3국의 연극제)가 있어요. 그때 동아일보 인민일보 아사히신문이 함께 주최한 회의에서 한국 문학 컷??맡아 회의를 한 적이 있었죠. 그 때 내가 웃으면서 "이게 바로 대동아 공영권이 아니냐. 이렇게 3국이 모여서 유럽이나 다른 지역공동체와 대응을 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지 않느냐. 80년 전 니들(일제)이 3국 관계를 잘못 다뤄서 실패해서 이 모양이 된 것이 아니냐?"고 질문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앞 뒤 관계를 다 자르고 이것도 "이문열이 대동아 공영권의 실패를 아쉬워했다"는 식으로 보도 되더라구요.

또 하나는 내가 일제 때 안 태어난 것이 참으로 고맙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참으로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태어나기도 전에 망한 나라를 조국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무리라고도 생각해요. 국민국가 이후의 제도 교육은 국민형성교육인데,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에게 친일파라고 하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는 거죠. 해방 이전 국제법의 보편원리는 '조약'이에요. 이게 가장 중요해요. 그리고 비엔나 회의의 원칙인 강자 위주의 원칙인 '관례'가 중요하죠. 당시 우리나라는 가쓰라-태프트 조약에 따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이 조약이니까. 내가 "그 조약 때문에 세계 국가들 중 어떤 나라도 우리를 위해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발언한 적이 있었는데, 언론에는 "이문열은 한일합방이 합법이라고 말했다"는 식으로 보도가 됩디다. 친일 관련한 발언은 말을 하면 할수록 이야기가 더욱 커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서 참았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말을 해야 하는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 중에는 이문열 팬이 많은데요. '안티조선운동'하는 이순원씨도 그렇고. 그런 사람들은 "공인 이문열을 가리고 있는 베일이 있다"고 말하던데요.

"오만하게 말해서 저는 그 베일이 나를 해치지 못할 거라 생각해 가만히 있었어요. 그런 것들에 이겨도 욕이 되고, 지면 손해라는 생각이었죠. 요즘 생각해보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또 다른 오해를 낳기도 해요. 진중권씨가 "이문열이 검도 5단이더라. … 그래서 보수더라"는 글도 봤어요. (손을 저으며) 난 검도 해 본 적도 없어요. 강준만씨도 여러 번 공격했어요. 6, 7번인가. 근데 그 사람도 "내가 이렇게 공격하는데 이문열은 왜 아무 말도 없느냐"고 비판을 하데요. 어떤 기자는 저더러 "왜 (비판에) 대응하지 않으세요?"라고 묻기까지 해요. 저는 대응한다는 것은 싸우겠다는 것인데 검도 5단이 검도 초단을 만나 싸우면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 같지만 팔 하나 내 줄 각오를 해야 해요. 그래서 난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인데요. 이렇게 말해서 내가 검도 5단이 된 것 같아….하하하"

◆그런 게 오해받는 데엔 작가의 책임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할 거에요. 가령, 내가 "누구는 개새끼가 아니다"고 했는데 옮기는 이가 "아니다"만 빼면 의미가 확실히 달라지잖아요. 아마 이문열이란 사람은 늘 지워져야 할 사람, 혐의를 만드는 사람일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워져야 할 문화권력이 된 것 같다. 제가 가끔 '홍위병'이란 비유를 쓰는데요. 홍위병은 죄는 비논리적이고 하찮지만 그에 대한 벌은 엄격한 게 특징이에요. 한 번 물리게 되면 그에게 가하는 죄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으로도 엉성하지만 그에 따르는 벌은 엄격하죠."

◆상대가 자신의 목적이나 단체의 이익을 위해 이문열을 지우고자 한다는 식인가요?

"그건 나만 당한 게 아니에요. 이를 테면 '안티조선운동' 같은 경우는 조선일보를 신문 중에 문화권력으로 생각하는 것 같고. 이렇게 비슷하게 고통당하는 경우가…. 아, 최진실. 그 분도 아마 그럴 거예요. 문화권력으로요. 제 기억에 저에게 <인물과 사상>을 구매해서 보내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대상에 최진실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기억나요."

◆담배를 끊으셨다죠?

"담배를 끊었어요. 제가 이렇게 뚱뚱해도 10년 전에는 혈압이나 당뇨가 없었어요. 근데 '책 장례식' 이후 혈압이 300까지 오르고 당뇨도 생기고. 어느날 문득 떠오르데요. '내가 담배 피워서 혈압, 당뇨 생기면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건강하게 살아서 누가 이기든지 봐야겠다는 신념이 생겼어요. 5년 전부터 끊었죠."

◆<선택> 이후 논란의 중심으로 빠져들었다고 보는데요. 그 당시에도 무대응이 답이지 아니었을까요?

" 내가 두 번 대응했죠. 전여옥이 하도 천방지축하기에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나"는 식의 글을 썼고요. 이후에는 "내가 그런 오해를 줬다면 유감이다"고 했는데, 그 쪽에서 "네가 일본 천황에 대해 어쩌고 저쩌고 말한 사람인데 무슨 유감이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더만요. (웃음)

저는 적대 핵심 세력이 없으면 운동이 탄력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당시 여성 운동이라는 것이 주목도 못 받은 상태에서 제가 먹잇감이 된 것이죠. 그 뒤 책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이들은 "(이문열이 문제를 일으킨 것은) 상업岵?생각으로 그런 것이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책이 한 번 논쟁에 휘말리면 잘 팔리거나 안 팔리거나 둘 중 하나에요. 그런데 저는 후자거든요. 전혀 모르는 작가가 그런다면 사람들은 "걔가 누구야? 책 속에 뭔가 있겠지"하면서 사 봐요. 근데 저는 신문에 나오게 되니까 대충 읽고 나서 아주 책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 식이죠.

영화도 마찬가지잖아요. 영화 촬영에 들어가는 소설은 끝이잖아요. 관객들이 영화를 본다면 소설을 다 봤다고 생각하니까요. 제 경우는 <선택> <변경> <아가> 등 3개가 가장 안 팔렸어요. 혹시 오해 살 수도 있는데 <변경>은 40만 부 팔린 것인데 이것을 안 팔려다고 하면 좀 그런가.(웃음)

◆<호모 엑세쿠탄스>는 얼마나 나갔습니까.

"이제까지 내가 당한 이야기 하소연만 했네요.(웃음) 전 이번에도 정치적 논란부터 터져가지고 '아이고, 틀렸구나' 했는데 다행히 10만부 정도 나갔다고 하데요."

◆시중에서 선생님을 말할 때 '보수꼴통' 점잖게는 '보수논객'이라고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보수꼴통'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제가 미국 버클리에 있는 동안 소설가 김연수가 같이 와 있었는데, 처음으로 만나 술을 마셨어요. 마시면서 제가 '니 내 실제 보니 어떻트나? P씨, C씨랑은 다르지?'물었어요. 그랬드니 김연수가 '그거나 그거나 다 그렇습니다'라는 거예요. 쇼크 먹었어요. 제 스스로도 조심한다고 했고, 난 속으로 그렇게까지 내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웃음)

◆그 낙차가 어디서 오는 걸까요?

" 보수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과거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미화하는 보수가 있어요. 그리고 과거를 미화하지는 앞선 사람들의 노력 중 인정할 건 인정하는 보수가 있죠. 전 후자입니다. 교육제도를 예를 들죠. 지금 바꾸려고 애를 쓰는 제도, 이건 국내 교육 전문가들이 고민한 것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3년 전에 이렇게 나쁜 제도를 만들려고 했겠어요? 그건 과실이지 고의가 아니라고요. 앞의 세계는 바보나 악당들이 만든 세계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는 더 나은 세계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 수 없으면서 말이죠. 제 생각에는 우리가 이만큼 사는 것도 앞선 살았던 이들의 덕택이라고 봐요. 이를 보수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지금 우리의 보수라고 부르는 사람 중에는 현재의 완전성을 믿어버리거나 과거에 나쁜 짓을 해놓고도 잘했다고 말하는 보수도 있어요. 이것들이 혼재된 상황이죠."

◆선생님은 '건강한 보수'이고자 하는데 많은 이들이 아니라고 해요. 선생님이 극우 보수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게 이유 아닐가요.

"그건 내 몫이 아니죠. 그것은 좌파들이 하고 있는데 굳이 제가 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까지 나에게 말하라면 균형에 안 맞아요. 주사파들은 한 때 선량한 시민을 프락치로 몰아서 죽이기도 했어요. 그들의 세상이 왔을 때에 그것에 대해 철저한 반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반성, 나는 하나도 못 봤어요. 하나도." (고개를 저으며)

◆진보들의 극좌적 시도에 대한 반성은 있었다고 보는데요. 오히려 보수들이 하지 않았죠.

"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을 나한테만 강요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왕안석의 경우만 바도 반성이란 것은 항상 반대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겁니다."

◆보수에도 급수가 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이 정도면 같은 패거리로 묶여도 기분 나쁘지 않다 싶은 보수 인사가 있습니까? 복거일 선생님 정도요?

"복거일 선생님도 참 좋은데 난감할 때가 있어요. 식민지 근대화론은 잘 이해가 안 됩디다. 사실 그것도 더 자세히 봐야겠지만 영어 공용어론도 다소 과격한 것같고. 구체적으로 개인은 말하기 어려운데, 굳이 말한다면 송호근 유석춘 교수 정도?(웃음) 농담입니다. 난 참 멋있는 보수가 되고 싶은데…, 그게 어렵네요. 인터넷 문화가 강화시킨 것 같은데, 한 번 (보수로) 찍히면 씻겨지지 않아요. 우리 시대는 주홍글씨를 벗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뉴라이트 운동 쪽에서 저한테 참여 제의를 했을 때 거절했어요. 새로 시작하는 일에 내가 가진 '과격우파, 보수꼴통'이미지가 부담으로 작용할까봐서요."

◆<호모 엑세쿠탄스>를 쓰시면서 줄 획수까지 맞춰 진보와 보수를 똑같이 욕했다고 하셨는데.

" 알리바이라고 생각해요. 이쪽 저쪽 모두 넉 줄씩. 한야대회가 100매, 그 반대편이 100매가 될 겁니다."

◆두 놈을 때려도 한 놈은 세게, 한 놈은 세지 않게 때린다고 볼 수 있어요. 양적 비판이 같다는 것은 논리가 좀 허약한 것 아닌가요?

"맞은 자의 느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죠. 저도 면피용으로 비율을 맞춰놓은 셈이죠. 노무현을 럭비공으로 말한 것, 기득권 층에 대한 것이 더 나쁜 것이냐 하는 데는 기준이 없어요."

◆그 같은 계량적인 비판은 작가로서의 자기 검열인가요?

"전 未璲介??대해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전 국가 검열이 강할 때는 어떤 경우 자기 검열을 하지 않아서 피해 보는 경우가 많았어요."

◆천하의 이문열도 자기 검열을 할 만큼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인데요. 그런데도 왜 굳이 그 얘기를 꺼내시는지요. 사회적 의무감인가요?

"설명이 긴데요. 하나는 자발적인 문학적 태도, 노선의 변화이고요. 하나는 속된 말로 중견작가로서 경험한, 뭐랄까 나의 공공성, 글쓰기의 공공성에 대한 인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손해를 보면서 자기 검열을 하는 이유가 있어요. 사람들은 그 부분을 보지 않는 것 같아요. 절 우파 논객이라 하는데 , 우파 작가라고 하기에는 제게 저와 (우파에서) 함께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80년대 후반 이후로 공식적인 우파 작가가 하나도 없어요. 술집에서는 나와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이전부터 어용단체에서 활동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우파 작가라고 밝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전 생각나지 않아요. 예를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 문단이 그런 식으로 (좌파 일색으로) 통일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어요. 복거일 씨의 경우는 문학보다는 워낙 다른 활동이 많은 분이니까. (한 기자를 보며) 내 얼굴이 좀 벌개요? 내가 좀 흥분했나요? 하하하. 내상을 입어서 그래요." (벌개진 얼굴로 웃음)

◆ 복거일씨가 '소설가는 악마의 편에 설 줄 알아야 한다' 즉, 다른 사람들이 다 악마라고 해도 그를 변호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요.

"전 그렇게까지 느끼지 않아요."

◆<호모 엑세쿠탄스>를 비롯해 선생님의 소설이 너무 직정적이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상상의 여백을 주지 않고 직설적으로 작가의 얘기만 전달하는 것 같다고 생각되는데요.

"저도 그 말을 자주 들었어요. 요즘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예전 소설도 저의 정치적, 사회적 소설은 지금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어요. <영웅시대>는 운동권의 금서였고, <시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비슷했죠. 회색주의적 태도, 무기력한 지식인이라는 비판도 있었고요."

◆저희는 그렇게까지는 생각지 않았는데요.

"87년 전남대로 송기숙 선생님을 만나러 갔었는데, 학생들이 제 얼굴을 알아보더라고요. 교정에서 떡 장사가 있기에 불러서 사 먹으면서 '내가 누군지 아나?'고 했더니 '안다'고 하대요. 그래서 제가 '내 책은 안 봤지?'?더니 '봤다'고 해요. 제가 '그런데 글을 읽고 그렇게 써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데요. (좌중 폭소)

그렇지만 전투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지금과 그 당시와 전혀 다르지 않아요. 내가 '시대와의 불화'라는 말을 그냥 만든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이 어디에 있든 문화적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쓴 말이에요. 87년을 전후로 적어도 문화사상적으로는 진보적, 과할지 모르겠지만 좌파적으로 기울었어요. 제대로 된 형태로의 우파, 보수 운동은 전혀 없었어요. "

◆<구로아리랑>이 86년 87년인가요?

"그 전에 깨진 소설로 <미로일기>가 있죠."

◆그 때까지만 해도 작가 이문열이 어떤 편에 서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되는데요."<영웅시대> 외에는 색을 드러내지 않았죠. 대부분 철학 종교 고향 이야기들이죠."

◆세상이 한 쪽으로 치우치니까 '나는 다른 쪽으로 간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그것 때문에 내가 규정되고 공격 당하니까 오기가 생기기도 하면서요 (웃음) '맛 좀 봐라'하는 생각도 있고. 이런 오기 외에도 제 믿음 중에 보수와 진보, 좌와 우 등 세상의 모든 관념이라는 것이 어둠과 밝음처럼 짝이 있잖아요. 정치사상과 세계 역시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만 남으면 문제죠. 나는 좌우로 나눌 때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너무 많이 가서 문제가 된 것은 2차 대전 시기이고, 사람들이 왼쪽에 너무 가서 문제가 된 것은 소비에트 혁명이라고 생각해요. 전 본능적으로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불안하고 겁이 나요. 때로는 다른 이들이 다 저기(좌파)에 가 있어서 스스로도 걱정되고 불안하고 불만스러워요. 나라도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87년 이전에는 한 가운데 있었다고 생각하시는데요. 앞으로 모두 우측으로 간다면 다시 움직이실 건가요?

"글쎄요. 그럴 가능성은 없는 것 같아요. 당시 사람들이 좌측으로 가면서 저는 우측으로 밀려난 셈이죠. 운동이 과열화하면서 나에게 위해가 되는 사람에서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 된 것 같아요. 제가 오기를 부려서 이렇게 된 것도 있지만요."

◆앞으로 우파 정권이 들어설 거란 예상이 높은데요. 기쁘시겠습니다. (웃음)

" 현재 여론 조사 결과는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50~60% 절대 다수를 확보해도 1년 후에 어떻게 될지 몰라. 제가 수십 번의 선거를 볼 때는 말이죠. 저는 사람들이 기억력이 좋고 이성적으로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그 때 가봐야 결정하지 지금 약간의 사회적 우위가 악수를 앞당기는 것 같은데요. 다시 (우측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당위적으로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개혁이라는 것이 정치적 과제로 떠오른 게 벌써 20년이 되었어요. 어찌 됐건 노태우도 헌법을 바꿔서 등장했고, 김영삼 "개핵개핵" (웃음) 얼마나 했어요. 현재에서 더 가면 다시 돌리지 못할 것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연애소설, 성장소설의 작가 이문열을 개인적으로 좋아했어요. 정치적인 것들은 칼럼을 써도 되고, 문학에서 잠시 언급하거나 완곡하게 말할 수 있는데요. 최근 너무 깊이 쓰니까 사람들의 식상함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아요. "그립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설의 시작과 끝이란 시차를 고려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호모 엑세쿠탄스>는 2002년부터 시작한 작품인데 이미 시동을 걸어놓은 거라 지금 시기가 좀 바뀌었다고 변경할 수는 없죠. 사람이라는 존재도 자료가 무한정하지 않습니다. 이번에(정치적 주제에) 상당히 많이 소진해 버렸기 때문에 다른 작품을 이 정도 쓴다고 한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열정에는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에요. <시인> <변경> <호모엑세탄쿠스>로 내가 구상한 것들을 쏟아냈어요. 아직 쏟아내지 않은 것에는 연애얘기가 있고, 나도 쏟아내고 싶은 게 있어요. 성애의 대상으로서의 여인과의 이별에 대해 잘 된 소설을 쓰고 싶죠. 마지막 여자를 보내는 순간 한 남자가 일생을 여성성과 만나고 감정의 축적을 쌓고 하는 것들을 써내고 싶거든요. 도대체 남자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지나가는지 통계를 곁들여 20세기 후반 풍속도도 함께 말이죠. <여인들을 보내며>라고 제목도 지어 놨습니다. 아마 구체적으로 쓸 수 있을 겁니다."

◆일단 사모님의 검열을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페미니스트들과도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웃음)

◆이문열의 문학성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흔들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이문열 소설의 매력은 주인공과 작가를 동일시 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촌스럽게 보이지 않는 묘한 매력이 있어요. <젊은이의 초상> <사람의 아들> 등에서 젊은 주인공의 고뇌는 이문열의 고뇌였죠. 근데 <호모 엑세쿠탄스>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제가 '찌꺼기 386'은 아니지만 386으로서 아쉬움이 커요.

"그때도 정치가 얇은 배경으로 나온 것들이에요. 정치에 대한 문제는 언제나 그럴 겁니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미학적으로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걱정 안 해도 돼요. 대신 놓친 것은 <매의 노래>라는 번역이 나왔어요. 저도 그걸 번역하고 있었거든요. 10년 전에 못 나왔어요. 이젠 시기를 놓친 것 같아요."

◆요즘 신춘문예로는 밥 벌이 못한다는데 선생님은 얼마나 버시는지? 이문열은 한 달에 인세만 2,000만~3,000만원 받는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 내가 처음 썼을 때 한 권에 1,500원 했는데 지금은 9,000원~만원 하죠. 제 책은 총 2,700만부 정도 팔았어요. <삼국지>가 1,500만부 정도. 그걸 제외하면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정도가 좀 팔렸지 아마. 제 책이 가장 많이 팔린 때는 83, 84년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위치를 옮긴 87년 이후부터에요. 그 후로는 완전히 대학가에서는 보수 반동으로 찍혔죠."

◆인세는 어떻게 받으십니까?

" 대작가도 신인도 똑같아요. 달리 받는 것은 참 할 짓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같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잘 팔리는 작가는 책 많이 팔아서 많이 벌잖아요. 거기다 인세까지 더 높은 비율로 받는다는 건 안 될 말이지."

◆부악문원은 계속 운영하십니까?

"계속 있는 애들이 있어요. 4기에서 끝나고 2002년부터인가 그 후로는 제대로 된 기수가 아니에요. 문생과 객원이 있는데, 문생은 일정한 커리큘럼을 가진 이들, 임의적인 창작활동을 하는 이들이고 객원은 그 커리큘럼은 참가할 필요 없이 글을 쓰는 친구들이죠. 지금은 객원만 있죠."

◆(주변에서 영어가 들리자) 저 영어 다 들리시죠?

"네? 하나도 안 들립니다. 미국서도 저 멀리서 한국어 한 마디가 들리면 그것만 들립니다. 하하하하."

◆지난 <호모 엑세쿠탄스> 기자간담회 때 방송 카메라에 정치부 기자들에 난리도 아니었는데, 정작 작품 리뷰 기사는 한 건도 없었어요. 문학보다 정치적으로 더 많이 소비되고 있는데, 그 이유 중 가장 핵심적인 게 2004년 총선 때 한나라당 공천심사에 참여한 때문인 것 같습니다. 후회 안 하십니까?

"양면성이 있어요. 공천심사에 대해 안이한 생각을 했죠. 그 땐 그게 정치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상당히 정치적인, 정치 중에서도 핵심적인 행동이었어요.(웃음) 손해도 있지만 소득도 있었습니다. 정치에 대한 핵심을 볼 수 있었어요. 안심과 한심을 경험했죠. 아주 구체적으로요.

◆이번 대선 때 그런 제안이 다시 들어온다면요.

"앞으로 제안이 있다 해도 다신 안 할 것입니다. 너무 소모적이었어요. 정치가 문학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을 망치는 거죠. 지난 6~7년 간 문학적으로 생산활동을 하나도 못했어요. 이번 책 나오고, <초한지>도 나오면 대충 다 나온 셈이라 볼 수 있겠지만 <초한지>는 순수 창작이 아니라서 생산성이 80~90년대에 비해 상당히 떨어진 것이에요. 문학성이 떨어진 것이 아닌 생산성이 떨어진 것이죠."

◆<삼국지> <초한지> 모두 극단적으로 말해서 노벨문학상 작가가 50명이 달려든다고 해도 그건 <삼국지>일 뿐입니다. 그것을 왜 이문열이란 작가가 달려 들어 시간을 소비하는지요.

" 우린 궁핍한 시대를 겪었어요. 전업작가로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에요. 당시 최인호 선배 정도나 겨우 살 수 있을까? 우리가 문학 수업할 때는 살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거 아니면 신문연재로 살았어요. 박종화 선생도 그랬고, 박경리 선배도 조금 아닌 소설을 연재한 적도 있었어요. 당시 작가가 글쓰기 외의 부업을 가져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하다가 후지가와 에이지의 인터뷰를 보고 "자기가 쓴 모든 책보다 번역한 <삼국지>가 더 많이 팔렸다"는 말을 어디서 읽어서, 나도 해볼까 하는데 민음사 박맹호 사장이 "해라 해라"해서 일생의 부업으로 생각하고 시작한 것이에요. <삼국지>의 작가는 제가 아니에요. 그런 말 들으면 전 펄쩍 뜁니다.(웃음) <초한지>는 좀 다른 것이, <삼국지>는 원래 구조를 그대로 썼어요. 하지만 <초한지>는 번역한 것이기보다 내가 꾸민 것이에요. 연의(演義)한 거죠. 그래서 이번 책에는 작(作)이란 말을 쓸 겁니다. 중국 고전이 아닌 역사 소설이에요. 번역은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 못지 않게 주고 받은 게 많은 일이었어요. 그래도 "이문열 작품 뭐 읽었어요?" 했는데 "<삼국지> 읽었다"하면 제일 황당합니다. 하하하하."

◆이런 질문 드려서 좀 그런데요. 연애소설인데도 보면 성적 표현이 너무 절제돼 있어요. 이유가 뭡니까?

" 저는 절제하는 것으로 가려고요. 김주영 선생이 맨날 저만 보면 "여관에 가면 잠을 자야지 왜 글을 쓰고 철학을 하냐나?"고 혼내요.(웃음)

◆양반 가문의 제약이 있었나요?

" 그런 것은 없고요. 양반들도 보면 얼마나 외설적인 책을 많이 썼는데. 거는 상상력의 생동감이란 거, 옷을 어떻게 벗기고 그런 것을 표현한 것보다 밤새 이불소리만 들렸다 캐도 되거든요. 상상력을 발휘하게끔. 제가 등장할 때 많이 나온 내용들 그래서 하기 싫어요. 성적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있고, 그것에 대해 나도 식상했던 때에요. <영자의 전성시대> <별들의 고향>이 유행하던 시절이잖아요. "왜 나도 이걸 해야 해"란 생각도 했어요.

박범신 선생이 그런 소설을 잘 썼는데 등단 이전의 인연이 있어요. 제가 서울대 사대 다닐 때 문학회에 나갔는데, 그때 매주 너무 좋은 소설을 써오는 친구가 있는 거라. 그 친구의 친구가 박범신 형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다 박범신 소설이었어. 하여간에 그 양반이 당시 입주 교사를 구하려고 한국일보에 광고를 하려는데, 연락처가 없는 겁니다. "전직 교사, 입주 원함"이란 문구와 연락처가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가정교사하는 집의 전화번호를 박범신 형한테 빌려 줬어요. 그때 지방에서 선생 하다가 때려치우고 올라와서 고생도 좀 했지.(웃음) 박범신씨가 책 장례식 때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어 아쉽다는 말을 하더군요."

◆어떤 작가들과 친하십니까?

" 일년에 서너번 정도 만나요. 김원우 같은 경우 대구에 대학에 가 있고. 윤후명, 유익서, 정종명씨 정도. 동인지를 3회 내면서 80년부터 매달 만났어요."

◆가장 애착 가는 작품은?

"글쎄요…. 제 공식 적인 대답은요 '가장 마지막 작품' 이카는 겁니다. 그건 다음 작품이 더 좋아지길 바라는 것이죠. 주관적인 만족도라든가 있는데 그건 4권 정도. <사람의 아들> <황제를 위하여> <시인> <아가>. <호모 엑세탄쿠스>까지 넣어야 하나?(웃음) 좀 억울한 것은 지금 봐도 제대로 쓴 작품 같은데, <시인>의 경우도 외국에서도 평도 정말 좋아요. 이번에 11번째 나라로 독일판이 나오는데 프랑스는 8,000부 재판 들어갔고, 영국도 재판. 그리스, 네덜란드까지 간 작품이죠.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팔리지 않은 작품이에요. 주관적인 평가로서는 <시인>이 내가 하고 싶다는 것에 근접한 작품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이문열이란 작가를 각인시킨 작품으로 <황제를 위하여>를 꼽아요.

"저도 신나게 썼어요. 쓸 때부터 운이 상당히 좋았어요. 문예중앙에 연재를 했는데, 게라를 줘서 인쇄를 하던 시절인데 제 소설의 게라를 여섯 개를 찍었대요. 신문사, 논설위원실, 국장실, 교정부용 등 달라는 사람이 많았대요. 원고가 오는 날은 게라를 다 가져가니까 아예 여섯 개를 찍駭鳴?하데요. 여담인데 오늘 술까지 마시면서 인터뷰 하자고 해서 오늘 혼나는 날이구나 생각하고 왔어요. 오마이뉴스도 했는데, 소위 악명 높은 곳이잖아요. 주변에서 "왜 (오마이뉴스와) 하느냐"는 말도 있었어요. 고민도 많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꾸밀 게 뭐 있나'하고 인터뷰 했죠."

◆지난번 100℃ 인터뷰이였던 공지영씨 경우, "생활비에 연연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는데, 선생님이야말로 전업작가로서 후배들에게 "전업작가가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하는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후배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창작하길 바라죠. 신문연재료 100만 원 할 때, 200만원 높이고, 200만원 할 때 500만원 부른 게 저예요. 그때 저는 돈이 어려울 때 아니었지만 후배들을 위해 그랬어요. 인터뷰료 받는 것도 했어요. 저는 예전부터 그랬어요. 가만히 생각하니까 제가 안 챙기면 안 되겠더군요. 신문사는 괜찮은데, 방송사는 탤런트에게는 (인터뷰 비를) 주면서 왜 작가는 안 주냐 이말이지. 그게 큰 부분은 아니지만 제가 할 수 있을 때 확보하는 것은 후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즘 젊은 작가들이 일상성에 너무 경도돼 있어서 서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잖아요. 선생님 하면 그 남성적 서사가 떠오르는데.

"실제 어떤 소설은 소설 시장을 축소한 것일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요소가 문학이 겪는 위축을 다 책임져야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가장 큰 원인은 사회전반의 변화죠. 문화의 중심이 소설에서 영화로 옮겨갔잖아요. 서사 역시 연극, 영화, 오페라도 쓰고 다 쓰는데 누가 그 중심에 서느냐의 문제죠. 결국 영화가 중심에 섰다는 것이죠. 그 다음에는 독자들의 사회가 변한 것 같아요. 우리 시대의 민주화, 자유화와 연관된 것일 수 있겠지만, 이상하게 전문성의 파열이 와서 이제는 문학적 전문성을 존중해 주지 않는 것 같지 않아요. 우리 집에서 작가 공부하는 애들을 보면, 저희 때 작가는 '작은 신'일 정도로 감동이었고, 신비스러운, 존경스러운 존재였어요. 근데 지금은 중견 작가들 보고"얘는 안 되겠어" 뭐 그러고 있습디다. 또 하나 있다면 글의 담론이 가진 전파력이 많이 차단된 것 같습디다. 제딴에 이번엔 이야기의 전통을 살리려 애를 쓰고 여러 수를 부렸어요."

◆젊은 작가들은 이런 얘기를 해요. 40년대생 작가들, 혈연적 의미의 아버지가 아닌 상징적 의미의 아버지. 결국 꼰대 세대가 된 건데(웃음), 그 가운데 남성적 서사를 구현한 이문열이 버티고 있는 셈이죠.

"이젠 그런가요? 우린 유복자 세대인데….(하하) 이젠 아버지가 됐구나. 어떤 것들은 우리 문학 작가들이 책임 져야 할 부분이 있고, 문화적 중심이 바뀌어서 생긴 문제도 있고. 아무튼 소설이 더 이상 밀려나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지분을 가지고 문학 판에서 살아 남느냐의 문제가 되겠죠."

◆선생님의 정치담론이 그나마 '이문열'이라는 작가를 독자들로 하여금 피하도록 만드는 상황이 아닌가요. 위와 같은 문학의 위기 상황을 복구할 책임을 갖고 계신 것 아니에요?

"다른 반증을 들겠는데요. 80년대 어떤 책들은 문학적 완성도가 그렇게 높지 않아도 담고 있는 정치적 담론에 의해 폭발적인 독자를 가져온 것이 있어요. 노동문학이나 <남부군> 같은 작품들. 반대의 경우도 있죠. 그런데 왼쪽으로(진보 쪽으로) 엎어지면 괜찮은데 제가 오른쪽으로 엎어져서 문제가 된 것 같아요, 하하하. 헤게모니 싸움에서 지원군이 있어야 하는데 전 없으니까요.

◆조중동이 있잖아요.

"문학적인 지원군이 아니잖아요. 어떤 때는 내가 뭔가 (발언, 작품활동을) 해 놓고도 잘못된 지원이 들어올까 봐 걱정될 때도 있어요."

◆옛 작가 이문열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게 선생님에 대한 지원이 될 듯 한데요.

"제가 등장한 시기는 정치 과잉의 시대였죠. 그 당시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은 별로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었어요. 현재도 정치 과잉의 시대라면, 그렇지 않은(정치적이지 않은)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어요. 천명관의 <고래>나 박민규 소설 같은 것은 현실 정치의 팍팍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생동감이 느껴져요. 그래도 판매에 실패하더군요."

◆그 소설들 잘 나가는 소설로 치는데요.

" 아, 그래요? 요즘은 2, 3만 부면 잘 팔리는 거라죠? 10만부만 되고 사장이 좋아하고. 아무튼 그런 책들이 꾸준히 나와서 주목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현실이죠."

◆진짜 소설을 끌어가는 힘 같은 건 다르지 않나?

"젊은 친구들의 상당히 활달한, 이야기적 상상력을 보았어요. 김영하 경우도 굉장히 자유로운 사상이 드러나요. <검은 꽃> 정말 잘 읽었어요. 외국 얘기만 나오면 우리 작가들은 상당히 위축 되는데, 김영하는 지명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각주도 달지 않고 주눅들지 않고 꼭附틸? 이웃동네 얘기처럼."

◆선생님 전 세대의 소설가에 대해서는요? 60대를 넘어서 주목을 받는 작가들이 없는데요. 그 근처에 있는 작가들이 있는데, 마르케스 같은 경우는 80세가 되어도 창작을 하잖아요.

"저도 늙어가니까 분석을 해봤는데. 그들의 오랜 작가적 체험이 주는 교훈이 있어요.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상당한 기획의 결과물입니다. 상당히 영악함을 드러내는 기획이라고 생각이 돼요. 저도 어떤 것은 좀 더 나이 들어서 써야지 하고 미뤄두는 것도 있고, 괴테의 <파우스트>는 1부가 30대 후반에 나오고 끝은 70대 후반에 나왔잖아요. 토마스 만 같은 경우도 70이 넘어 쓴 것도 읽을 만한 괜찮은 작품이 나온 경우도 있어요. 대다수는 우리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웃음)

오늘 나오면서, 내가 쓰겠다는 '책 중에 서문을 한 번 띄워보자'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명하는 자리로 만들고 싶었는데, 오늘 서문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변명을 자꾸 하려는 것을 보니 늙은 것 같아요. 제가 "이 나이에 외국에 왜 가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앞으로 살 날이 20년 정도 남았는데, 내가 젊은 날 읽은 책 갖고 여기까지 왔는데 앞으로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미국에 가는 2년이라도 앞으로의 밑천으로 만들려는 생각으로 가는 겁니다. 그게 약해진 거죠."

◆아니 오늘 모습은 강하게 보이는데요.

"혈압도 300 가까이 올라가고, 미국에 약도 지어가고 그런다니까요."

◆시대와의 불화라고 부른 그것을 앞으로도 피할 생각이 없나요?

"어떤 형태로든지 시대와의 불화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어요. 날 100% 받아주는 시대는 있을 수 없죠. 그러한 경우는 사기를 쳤거나 사람들이 이상한 경우죠. 예를 들어 한 마을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모든 이가 그를 "착하다"하면 그 사람은 결코 착한 게 아니에요. 마을에는 착한 사람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착한 사람은 "착하다", 나쁜 사람은 "착하지 않다"고 해야죠."

◆조금만 비굴해지면 행복할 수 있잖아요. 그런 유혹을 느낀 적 없나요?

"왜요, 당연히 느끼죠. 어떤 마을에 120살 먹은 노인이 있는데 귀신에게 나를 잡아가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젠 사회관계를 나눌 사람이 다 죽어버리고 자기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것을 처음 들었을 때는 "우화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부쩍 그 노인의 심정을 느껴요. 제가 젊은 세대와 (한글) 맞춤법도 같고 (비슷한) 교과서로 같은 내용을 배웠는데도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아요. 그런 마음이 들 때 겁이 나면서, 나를 버리고 그들에게 달려가서 아첨이라도 해봐야지 하는 유혹이 생겨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행동이야 말로 정직하지 않고 두 번 욕을 보는 경우가 아닐까 생각해요. 시미다 마사히코라는 친구가 나카가미 겐지 얘기를 하면서 "나는 그의 제자가 아니라 학대 당했다. 겐지가 나의 독자를 질투하더라"고 했어요. 저도 후배들을 보면서 그들의 독자를 두고 질투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제가 모든 독자들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욕심을 버리게 돼요. 저에 대한 평론도 제 또래인 권영민 등의 평론가들이 많이 하고요. 그들이 가장 저를 잘 이해하고, 김영하의 경우도 그 친구 또래의 평론가들이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죠. 그것을 두고 제가 질투해선 안 되죠. 문학을 정치화시켜 "문학성이 침해 당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고. 제가 넘어지는 방향이 생 각한 대로 가지 않는 상황에 대해 말씀 드리는 겁니다."

◆저희는 작가 이문열과 같이 늙어가는 독자들이 낙오되고 줄어들게 되는 것을 우려해서 한 말인데요.

"제가 여기서 털어놓지 못하는 '본능적인 공포' '미래에 대한 비관' 같은 게 있어요. 지금 내가 "과거를 털어버리겠다. 비정치적, 무정치적이 되겠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불가회성'(不可回性)과 관계 있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첨예한 현실정치와 관련되는 것이죠. 예를 들면 이번에 들어오자마자 조선일보에서 칼럼을 써 달라고 했어요. 제 생각에 제의를 수락하면 너무 정치적인 글을 쓸 것 같아 문화에 대해 썼는데요. 정작 쓰고 싶은 내용은 들어온 지 이틀째에 본 한 대담 프로그램이었어요. 북한의 대북정책에 대해 토론을 하는데 야당이 '퍼주기' 공격을 하니까, 여당 중진이 "그럼, 전쟁을 원하십니까?" 그러더군요. 야당의원이 당황해서 "우리는 전쟁세력이 아닙니다"하면서 쩔쩔매요. 제 생각에는 오히려 여당 의원에게 당당하게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당에서 북한에게 지원을 안 주면 전쟁이 난다고 했는데 "당신은 대체 어느 나라 여당의 각료요?"하고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근데 자신이 전쟁세력이 아님을 증명하느라 노력하는 모습이 어찌나 보기 싫든지. "그럼, 이제껏 북한에게 준 것은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그런 건가요?"라고 되묻고 싶었고 그것을 칼럼에 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그 이유는 제 생각 뒤에 숨은 공포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방향으로 가더라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불가회성. 요새 시청 앞에서 70, 80 드신 노인들이 정부에 대한 비판을 외치곤 합니다. 언론의 카메라가 이상하게잡으면 굉장히 희극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실이 너무 슬퍼요. 숙연해지죠. 절대 희극이 아닙니다."

◆선생님 부친은 월북하셨는데, 부모에 대한 불만도 있을 테고, 당신의 사상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요. 달리 생각하면 그런 배경에서는 오히려 사상적으로 좌파에 가까울 수 있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와 관련해서는 20대 초에 끝났어요. 20대 중반 되니까 두 가지로 정리되더군요.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격렬하고 비극적인 얘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는 아버지 살해 다룬 것인데, 저의 아버지 살해는 일찍 온 편이죠. 그 후로 그런 사실에 묻혀 사는 게 이상하게 생각이 되더라고요. 독립한 셈이죠. 그럼에도 아버지에 대한 동물적인 감정은 오래 가요. 친북, 반북과 연관짓자면 아버지의 삶이 보여준 실제 결과가 제 반북 정서를 자극했을 거에요. 당신(아버지)은 남한에서 많은 것을 버리고 갔어요. 좋은 집안 재산 일본유학 등 모든 것을 버리고 갔는데 알고 보니 1954년에 함북 종성에 있는 협동 농장에 있는 거야. 그곳은 아오지 탄광과 다를 바 없어. 거기서 15년 동안 그 일을 했어요. 겨우 15년 만에 조금 남쪽으로 내려와서 농업지도원이 돼요. 학벌 때문인지 볍씨를 개발해 훈장을 2개 받았대요. 그 후에 청진에 내려와 15년 살다가 그 후에 3년 정도 더 살아요. 그것을 제가 서른 넘어서 알았는데, "우리(가족)가 남한에서 서럽게 살았는데 당신이라도 거기서 잘 살아야지"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그 사실로 원시적인 의미에서 북한을 용서할 수 없는 집단이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80년대 이후 우리나라 젊은 세대들의 맹목이랄까, 재벌이 아들에게 600억원을 넘겨주는 것은 전세계 유래 없이 난리가 나는데, 김일성이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나라를 넘겨주는 것에는 별 반응도 없고 당연히 여기고 해요. 오히려 저에게 "당신은 만약 지도자의 자질이 있는데 김일성 아들이란 것 때문에 (김정일이)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냐"고 물어보기도 하더군요."

◆그런 경도에 대한 좌파들의 반성은 많지 않았습니까.

"전 아직 그들의 솔직한 반성을 보지 못했고, 심도 있는 회개를 보지 못했어요. 그런 말들을 한 사람들이 이상한 쪽으로 빠져 이상하게 풀린 것은 봤어요. 또 정권의 핵심에 들어간 사람들 역시 (그것에 대한) 공식적인 반성도 없어요."

◆최근 젊은 보수, 젊은 세대의 보수화에 대한 우려도 많이 나오는데요.

"제가 최근 자신 없는 것 중 하나가요. 우리가 배운 게 민주주의인데, 대선에서 2.4%가 많아서 현재 대통령이 나온 거잖아요. 뒤에서 그 결과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을 보면 자괴심이 들어요. 다음 세대에 대한 것도 그래요. 그들이 앞으로 살 시간이 훨씬 길 텐데 말이죠. 나는 "나더러 (그들의) 눈물을 닦아 달라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럴 때 젊은이들이 하는 말이 "이회창씨가 대통령이 됐다한들 뭐가 달라졌겠냐"는 거 아닙니까.

"그건 모르죠.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고. 그건 안된 사람이 유리해. 왜냐, 확률은 반반이니까."(웃음)

◆소설 쓰고 나서 문중 어른에게 야단 맞은 적은 없나요?

"문중이 아니라 어떤 여자에 대해 적나라한 연애 얘기를 썼는데 그 남편이 어떻게 알고 이혼을 하네 어쩌네 문제가 된 적이 있었어요. 그 친구는 모 대학 국문과를 나온 친구라고요. 보자고 해서 "이를 어떻게 할까" 하다가 술을 먹자고 해서 갔다고 하도 뭐라기에 "야 이눔의 새끼야, 니는 국문과 나왔다는 놈이 소설과 현실을 구분도 몬하나"라면서 술을 부어댔죠. 하하. 또 한 번은 문중 어른에 대해서 신문 기자와 르포기사를 쓰는데, 극존칭으로 쓸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늙은 주인은 없고 집은 비었다" 고 썼는데 자신을 늙은 주인이라고 했다고 난리가 났죠. 또 한번은 악역 없는 소설이 없잖아요. 문중 어른을 악역으로 두고 썼는데, 그 분이 어떻게 아시고, "그래, 내가 한 일에 대해 쓴 것은 좋은데 왜 안 한 것까지 (소설에) 썼냐"고 혼내시기도 했어요."

◆싸움 방식을 바꾸는 건 생각하시나요?

"아예 충돌의 기회를 없애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있어요. 죄를 지어도 봐 줄 때, 조선시대 '방귀전리' 처럼 유배보다 가벼운 형벌을 받을 수 있을 때 "나는 더 이상 그런(정치) 이야기 하지 않고 살겠다"고 생각도 들고 해서 불화의 기회를 없애려고 생각도 있죠."

◆미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시려고요.

"제가 허먼 멜빌의 <백경> 같은, 신비한 해석을 좋아해요. 모비딕은 희랍 비극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고. 나다니엘 호손도 함께 읽고 싶어요. 누구는 저더러 "그건 현대문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고 하더만요.(웃음) 전 패배할 줄 알지만 도전해서 깨지는 영웅을 좋아해요. 그리고 또 하나는 하버드 동아시아학이 10년 전부터 양명학에서 주자학 주류로 바뀌었답디다. 그래서 미제 주자학을 좀 배워볼고 합니다."

◆역시 보수 이문열은 주자학도 미제로 배운다고 욕먹는 거 아닐까요.

"하하하. 그랄라나?"

◆작가 이문열에 대한 기대에는 한 시절의 교양을 대표하는 소설에 대한 기대도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칼이 되어서 돌아오기도 해요. 내가 그래서 천박한 교양상업주의라고 직사게 욕을 먹은 거 아입니까.(웃음) 조금 점잖게 말하면 현학서. 찾아보면 금방 나와요. 사람들이 착각하는데 얼마 전 보도를 보니까 우리 시대 과평가 된 작가로 이문열을 꼽았든데, 평단은 절 과평가해 준 적이 없습니다. 85년 이후 이문열에 대한 평론 가운데 저를 인정하는 것과 까고 부정하는 것은 2대8 정도예요."

◆비판도 평가니까요. (웃음).

"그런가요? (웃음). 통계 한 번 내 보세요. 87년 이후 것(평론)으로 내보세요."

◆선생님도 노벨문학상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선 가능성이 전혀 없고.(폭소) 그 쪽(노벨상)과 코드도 전혀 맞지 않아요. 그들이 말하기를, 그 상은 문학에게 주는 게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문학을 통해서 인류의 자유 정신, 민주화에 이바지한 사람들한테 주는 것인데, 문학을 잘 해서 장사 잘한 사람들은 해당 없습니다.(하하) 그런 말을 들었고, 실제로 그랬고요. 또 내도 그거 달라칼 만한 염치도 없고. 내가 뭐 징역을 한 번 갔나, 자유화 민주화에 개입하길 했나, 난 전혀 해당 없어요. 대신 내한테 선택이 가능하다면 노벨상보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내는 겁니다. 영어로요. 번역해서."

◆노벨상 수상을 위해 뛰고 있는 작가들이 있는데요.

"네 있죠. 우리나라 작가들이 가능성도 있고, 현실성도 있는 겁니다. 한 번은 우리한테 올 때도 됐습니다. 코드와 근접해 있는, 말하자면 문학을 통해 인류의 자유 증진에 이바지한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누구라고 말을 몬하겠습니다."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 누가 받는 게 나을까요.

"내는 선택도 몬하겠지만, 누가 받든지 중요한 게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주면, 한국에 주면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의 중심에 편입시켜준다는 의미일 거에요. 이제껏 받아본 데가 그렇거든요. 아시아에서는 인도, 중국, 일본권에서 탔잖아요. 타고르는 인도인이지만 영문학의 일부고요, 임어당과 가오싱젠도 모두 영어 불어로 썼어요. 자국 언어로 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일본이에요. 일본의 두 작가가 수상했지만 '그들이 당대 1등 작가였나' 하면 아니라잖아요. 한 때 '일본은 노벨상 때문에 2명이 죽었다'는 말이 있었어요. 야스나리는 수상의 중압감 때문에 자살, 미시마 유키오는 못 받아서 죽고. 받은 두 사람에 대해 1등이란 평가는 없는 것 같습디다. 그건 그 나라의 문학이 받은 거죠.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한국문학이 길을 돈 거죠. 왜냐면 직접 세계문학으로 가기는 굉장히 힘듭니다. 그런데 노벨상을 받으면 세계화의 가장 빠른 지름길을 가는 거죠. 그렇지 않고 경제의 시장을 통해 갈라카면 굉장히 멀고 험합니다. 꼭 누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없지만 글쎄 꼭 말한다면은…."

◆(일동) 말한다면요?

"시비를 잠재우거나 애매함 속에 남겨두려면 시 쪽에 주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해요. 왜냐면 소설은 구체화되기 때문에, 근데 시는 좀 애매하거든요. 시비의 소재라거나 그런 걸 잠재우려면. 근데 이렇게 말하면 너무 노골적으로 한 쪽을 미는 것 같은데.(일동 폭소) 누구든지 관계없어요."

◆노벨상 수상도 좋지만 그것을 위한 노력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데요.

"그것도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상을 위해) 상당히 유효한 방법이었습니다. 5년간 맨날 기자들이 집 앞에 와서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해요. 그게 위원회 쪽에 상당한 압박이 됐다고 합니다. 아, 한국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것이고. 꼭 그것을 빈정거릴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척하고 도와줄 수 있으면 기자들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념이나 진보를 자신을 팔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작가가 있는데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있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있고요. 미국 사회에서도 그런 게 힘을 발휘하는 것 같은데, 미국에서도 똑똑하게 튀려면 진보 쪽으로 튀어야지 네오콘 하고 자빠지면 이건 확 가는 거예요.(하하하) 그건 어디나 다 있는 문제입니다. 그가 선택한 길에 대해 뭐라 할 말은 없지만요. 그런데 다만 이런 건 있습디다. 그 반대의 경우, 제가 미국서 살았던 곳 근처에 오클랜드라는 항구도시가 있어요. 항구에 잭 런던의 동상이 있는데, 그는 사실은 참 무식한 작가인데, 굉장히 철학적인 사람입니다. 수도 필로소피, 그 머라카나, '의사철학의 명수'라고도 하죠. 니체와 마르크스 사이를 종처럼, 진자처럼 왔가갔다 해서 욕을 먹기도 하죠. 근데 나는 그 사람 좋아합니다. 전 괜히 그게 반갑기도 하고 좋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그는 미국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게 소셜 리얼리스트가 돼가지고, 우리나라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죠. 80년대 후반 <강철군화>가 번역됐고 <야성의 외침> 같은 작품이 번역되기도 했지만요. 그런데 오히려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하나 말고는 없는데, 영화도 되고 잘 됐죠."

◆잭 런던은 나중에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었잖아요.

"그게 인제 바로 저거죠. '니체하고 마르크스 사이를 막 왔다 갔다 했다'고 그랬잖아요. 근데 변절해 봤자 그거 별 큰 그런 우리가 생각하는 변절은 아니고(허허허)"

◆초기 추리 작품이 있었죠. 국내에도 잭 런던 책이 꽤 번역되어 나왔는데요.

"근데 말이죠. 내가 문학 수업할 때나 80년 이전엔 본적이 없어요. 그가 살던 오두막을 갖다 그대로 옮겨 놓았는데 정말 사람 하나 길이더군요. 오두막이 우리나라에도 거런 오두막이 없겠더라고. 요 방보다 조금 더 큰 방 하나 있는 집이에요. 그걸 그대로 들어내 가지고 부두에 옮겨 놨는데 그렇게 가난한 자식 노릇하다가, 부두 노동하다가 그리 했는 모양인데.(웃음)"

◆<호모 엑세쿠탄스>를 대선과 연관지어 보는 시선도 있는데요.

"헛헛헛. 글쎄. 근데 선거가 있는 해에 나온 책에 대고 또 선거철이냐 카믄, 자 선거 해에도 못쓰지 내년에 국회의원선거 있으니 또 못쓰지. 뭐 우리 나라 작가들은 선거마다 피할라카겠네.(웃음)

참 근데 그게 그래요. 제일 고약한 게, 대응을 못합니다. 어이 해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냥 그리 꼼짝없이 당하고 있는 건데. 이게 오래 쌓이니까 나도 그게 화가 난 거에요. 왜 나라고 해서 계속 터져야 하냐 이거예요. 뭐 맷집 좋고 하니까 좀 맞으라 하는 건데. 맷집도 한계가 있고. 그리고 또 이런 게 있습디다. 예전에 우리 시대만 해도 문단에서 서로 이념적으로 사이가 나쁘다 해도 만나 가지고 인간적으로 나빠진 적은 거의 기억이 안 나요. 오히려 이럴 때가 있었는데. 나중에 우리 후배들이 드니까, 문학 모임에 가면 서평 하는 아무개가 갑자기 내하고 눈을 안 마주치려고 저쪽 구석에 가있고, 뭐 그렇게 피하고 해요. 그럼 좀 수상해. 그러면 물어봐요. 무슨 문제 있냐고. 그러면 지난번 제가 어디따 선생님 글 나쁘게 썼다고(그래요). 허허허. 이게 문인이에요. 그렇게 해놓고도 마음이 약해져 가지고. 그때 특히 김성동이 한 말이 있어요. 김성동이는 자기말로 네 판에서 놀아봤대요. 절판에서 이판사판 해봤고, 그 다음 사회 나와서 바둑판에서 놀아 봤고, 한국기원에 오래 있었으니까. 그 다음에 문학판에서 놀아봤다고요. 네 판 중에서 놀아보니까, 이 문학판의 제~일 못된 놈이 나머지 세 판의 제일 착한 놈 하고 비슷하더라, 그러더군요. ?하하하. 음 이렇게 기본적인 그 우리 정리, 요새는 그게 깨지는 것 같애. 그래 가지고 문학적으로 뭐 나쁘면 말이죠, 사람까지 그마 이상하게 되는. 그 참 아주 쓸쓸한 걸 경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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